- 사업이야기
[봄빛기금 장학사업] 봄빛장학생 성장스토리 2. ‘평화를 꿰메는 바느질’
봄빛기금 장학사업
평화를 꿰메는 바느질
봄빛장학생 성장스토리
김진희 씨(가명. 42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단체를 먼저 소개하고 싶어 했다. 그곳은 탈성매매 여성을 위해 상담, 법률지원, 의료 지원, 자활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진희 씨는 거기서 탈성매매 여성들에게 퀼트 만들기와 재봉틀 바느질을 전담하여 가르치며 그녀들의 자립을 돕고 있었다.
‘공방’이라는 팻말이 걸린 방, 한쪽 벽에는 갖가지 색깔 고운 실패들이 촘촘히 걸려 있고, 다양한 질감의 천들이 쌓여 있었다. 나란히 놓인 재봉틀 앞에 앉아 무언가 만들고 있는 수강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모여 바느질을 하는 모습은 누가 뭐래도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풍경이 틀림없었다.
누구나 원한다면 만들어 낼 수 있는 풍경, 그러나 아마도 이 여성들은 오랫동안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풍경이 아니었을까.
김진희 씨는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고 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아해서, 학교를 체육특기생으로 다녔다. 운동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중간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그녀의 학교 시절은 배움도, 친구도, 추억도 없는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말았다.
행복은 여러 가지 모습이지만, 불행은 한 가지 모습을 갖고 있다고 했던가. 그녀의 가정 역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성매매 생활로 밀어 넣은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무턱대고 시작한 생활이었다. 아무도 그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청소년기였다. 세상은 몰랐지만,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만은 알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녀는 15년가량 그 생활을 계속했다. 여러 종류의 업종을 전전했다. 새로운 업종으로 옮길 때마다 빚이 늘어갔다. 몸이 아파서 일을 못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불’을 쓰고 있었다. 그 밖에 온갖 불합리한 업계의 규정들을 불합리한 줄도 모르고 지켜야 했다. 고통을 참아가며 일을 계속 했지만, 돈은 벌지 못했고, 몸은 망가졌고, 나날이 무는 이자는 계속 늘어갔다.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갈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 ‘몸’으로 일을 하는데 번 돈은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고 느꼈고, 이 세계를 벗어나야 착취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업소 주인들과 연결된 ‘조직’ 사람들이 무서웠지만, 어느 날 기회를 틈 타, 무조건 몸만 도망 나왔다. 그리고 주민 등록도 없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 혼자 은둔하는 생활을 3년이나 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쫓아올까 두려워 월세 방, 여관을 전전하며 숨어 살았다.
당시에는 공권력이나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담센터에서 법률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오랜 은둔 도망자 생활 끝에 겨우 한 상담센터를 소개 받았고, 그 센터는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그것이 약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경찰을 믿지 못했어요. 업소와 연결이 되어 있는 걸 많이 봤거든요. 그러니 업소에서 도망 나와 쫓기는 동안 경찰에 신고한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무조건 숨어 지내면서 잠깐씩 최저생계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만 했지요. 당장 누군가가 붙잡아서 다시 팔아 버릴 것 같고, 단속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바로 멈추는 것 같고, 정말 힘들었어요.
물론 업소 주인들은 여성들이 도망가면 당장 쫓아와 잡지는 않는다는 말도 들었어요. ‘언젠가는 주민등록증을 만들겠지, 언젠가는 결혼을 하겠지.......’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린대요. 그러다가 자기네가 필요할 때 잡아들인다는 거예요. 잡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당장 잡기도 한다고 하고. 아무튼 저는 잔뜩 겁을 먹고 죽은 듯이 숨어서 살았어요.
언젠가는 ‘성매매와의 전쟁’을 하겠다는 여자 경찰서장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기에 ‘저 사람은 나를 보호해주겠다’ 싶어서 그 경찰서에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전화 받는 직원이 굉장히 사무적인 거예요. 나는 당장 죽을 것처럼 무서운데 내 사정은 모르고 그냥 업무 처리하듯이 통화를 하더라고요. 지금이라면 다 이해하지만, 그때만 해도 세상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을 때라서, 결국 다시 숨었죠.”
세상에는 믿을 만한 사람도 있다는 것, 순수하게 나를 돕는 사람도 있다는 것,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오랜 고통의 시간 뒤에야 알게 되었다.
바로 지금 그녀가 일하는 곳이, 그녀에게 새 인생을 살라고 손 내밀어 준 상담센터였다. 그러니 그녀가 일터를 먼저 소개하고자 했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바느질을 배우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몇 년 뒤, 자기가 교사가 되어 후배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결혼도 했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편과 힘을 합쳐 건강한 가정을 꾸려가며 새롭게 인생을 살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그녀는 무사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 오는 후배들 보면, ‘미래를 생각해라, 계획을 짜라, 지난 번 그 일은 잘 진행되고 있니?’, 하는 식으로 자꾸 잔소리를 하게 돼요. 후배들의 어려운 처지를 공감하고 이해해주고 무조건 말을 다 들어주고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저는 자꾸만 채찍질을 하게 돼요.
사실 후배들에게는 이 상담단체 쉼터 생활이 편할 거예요. 여기서는 따뜻하게 배려를 받거든요. 그렇지만 사회에 나가면 그렇지 않잖아요. 당장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고요.
그러니 여기서 자격증 하나라도 제대로 따놓고, 자기 앞 날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훈련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사회에 나가자마자 다시 부적응 상태가 됩니다. 지금 제도로는 3년 정도 여기서 보호받으며 훈련 받을 수 있는데, 그게 긴 것 같아도, 짧아요. 우리들이 세상에 적응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녀는 ‘사회성’을 기르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업소 같은 곳에 갇혀있다시피 살면서 그곳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을 그냥 받기만 하며 살다보니(물론 그건 그냥이 아니라 엄청난 고리의 이자로 선불한 것이지만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대중교통 이용하는 법이나, 길 찾는 법, 시장에서 물건 사는 일조차 서툴러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배우지 못해, 때와 장소, 사람에 맞게 인사하고 대화하는 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각자가 극복해야할 심리적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아주 작은 일들도 일일이 배우고 느껴야 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자활 훈련기간 동안 부지런히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여성들은 의지력이 부족하고 세상에 대해 겁을 먹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자활훈련이 끝나고 나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틈이 생기면 다시 성매매 시장으로 유입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후배들의 어려움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자꾸 간섭하고 채찍질 하게 되는 것은 인생을 다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 같은 ‘당사자 활동가’(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이 반성매매활동을 하는 경우)의 심정이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든든한 선배였다. 이 여성들의 깊은 사정을 다 알고 있고, 개인이 감당해야할 과제를 철저하게 챙기면서 동시에 성매매문제를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직접 겪으며 몸으로 깨달은 선배인 것이다.
그녀가 대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몸으로 느낀 필요’ 때문이었다.
“제가 중 고등학교 다니면서 공부할 일이 없었잖아요. 저는 체육특기생이었으니까 매일 운동만 했거든요. 원래 공부에 취미도 없고, 한 적도 없었어요. 그러니 대학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어요.
여기 센터에 처음 취직했을 때도 고졸이었어요. 원래 대학졸업 이상만 취직 할 수 있는데, 저는 ‘당사자’잖아요. 그래서 특별히 채용이 된 거거든요. 여기 상담하러 오는 분들하고 같은 처지였던 사람이니 꼭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로.
그런데 여기서 일하다 보니, 공부가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뭘 알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아주 절실하게 들었어요. 후배들 상담해 주다 보니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앞을 멀리 내다보고 싶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고 싶고, 저는 복지라는 단어도 제대로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 사회복지가 무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고.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데도 또 한편으로는 손가락질하고 빼앗아 가는 사회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어요. 알아야 한다, 배워야 한다는 마음이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는 거 에요.
그래서 일단 무조건 질렀어요. 대학 입학 원서를 낸 거예요. 사회복지학을 전공으로. 그런데 등록금을 보니, 아무리 사이버대학이라 해도 제가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포기를 했어요. 입학은 했는데,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졸업은 포기를 한 거예요.”
그러다가 봄빛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기뻤다고 했다. 그토록 원했던 대학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아마 그녀에게 이 돈은 평생에 가장 ‘큰 돈’이었지 싶다. 더구나 열심히 공부를 계속하는 한 장학금이 중도에 끊길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니,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며 상담센터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어서 그녀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일이었다.
“여성 재단은, 일일이 묻지 않아요. 그게 좋아요. 물론 후원하는 분들의 입장을 잘 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어요. 그런데 ‘사진을 첨부해라’ 이런 요구를 하는 곳도 있거든요. 우리 사정을 잘 모르시는 거지요. 그런데 여성 재단은 자세히 캐묻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자격심사와 사후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을 존중해준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여성 재단이 고맙다고 했다.
그렇겠다. 도움 받는 사람의 인격, 후원 받는 사람의 자존감, 그런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 때로는 후원금의 액수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후배들에게 역할모델이 되고 있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도 하고, 후배를 위해 자리를 터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심하기도 하고, 센터 사업의 새 영역 개척을 계획하기도 하고, 효과적인 잔소리 방법을 고민하기도 하고.......
한 마디로 그녀의 고민은 싱싱하고 건강했다. 그것은,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자기 손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지는 심플하고도 싱싱한 고민이었다.
“세상이 정말 달라졌어요. 요즘 어린 친구들 상담 왔을 때 들어보면, 돈이 계기가 아닌 경우가 많아요. 부모와의 갈등, 외로움, 좋은 브랜드에 대한 욕심, 이런 것들이 많아요. 특히 외로움이 큰 이유예요.
그리고 요새는 유혹당하기가 너무 쉬워요. 사회 환경이 그래요. 길가에 전단지도 많고요, 아르바이트라고 광고 내는 것들 중에 이상한 것도 많고요. 그러니까 애들이 많이 노출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더 많아 질 거 같아요. 알바라는 형식으로 파트타임처럼 도우미 하는 것도 늘어날 거고.
결국 이 일이 여기저기 다 갈취당하다가 끝나는 일이라는 것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알아야 하는데, 막상 어린 애들은 모르니까 이런 단체를 찾지 않고, 시간이 지나서야 이런 곳에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그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세요?”
진희 씨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1주일에 한 번씩 현장(유흥가)에 나간다고 했다. 성매매여성들에게 안내문도 돌리고, 기초적인 법률 지식도 알려주고, 상담센터의 전화번호도 가르쳐주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고 했다. 그것이 그녀가 세상의 이중성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들을, 이 생활에 빠져들도록 유혹해 놓고는 뒤에서는 손가락질하는 이중성이 싫다고 했다. 아무리 쉬지 않고 이 일을 해도 결국에는 ‘다 갈취당하는 구조’를 이 어린 애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비록 그 애들은 아직 알고 싶어 하지 않지만 말이다.
당사자활동가 김진희 씨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 공부였다. 세상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방법을 가르친 것도 공부였다. 공부가 왜 그토록 필요했었는지를 오늘처럼 절실하게 들은 날이 얼마나 있었던가. 봄빛 장학금은 그녀의 절실함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고마움을 세상을 향해 갚고 있었다.
재봉틀 돌아가는 ‘드르륵’ 소리가 평화롭게 들렸다. 머리를 맞대어 바느질에 골몰하는 모습도 평화로웠다. 오늘 이들이 누리는 이 평화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한 사람이 고통 중에 홀로 극복해내던 눈물의 시간, 그 사람에게 손 내밀고 기꺼이 도와준 사람들의 따뜻한 시간, 인격을 존중하는 돈으로 후원해준 사람들의 속 깊은 시간, 그런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진정한 평화의 시간 아닌가 말이다.
정영훈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