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날개]대한민국에서 이주여성으로 산다는 것
- 희망날개
문화다양성을 위한 다문화여성 문화커뮤니티 지원 프로젝트
– 인물 인터뷰 ‘장미’편
꽃봉오리가 단단하게 오므리고 있는 그 순간에는 모른다.
그것이 지닌 향기와 만개했을 때의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되지 않아서다.
창원 축제 현장에서 만난 ‘장미’ 씨의 입이 하나, 둘 열린 자리마다 친근한 향기가 퍼진다..
장미 씨는 중국에서 의과대학을 마치고 한국에 결혼이민을 왔다.
언제 왔냐는 물음에 너무 어리고 한창 예쁠 때 왔다며, 지나간 젊음을 아쉬워 했다.
그녀 나이 올해 28. 아직도 한창인 나이다.
바로 말을 덧붙이며 꿈을 꾸며 삶에 대한 목표가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을 다듬는다.
어린 ‘장미’씨는 얌전하고 보통의 여느 아이들과 다름 없는 아이였다. 친구들과 노래방이나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기숙사 생활을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1주일에 한 번 외출이 있었지만 여러 번 담을 넘기도 했다고 한다.
담치기 하고 놀러다녔다고 하는데 공부를 게을리 하진 않아서 의과대학에 진학을 했다. 본래 꿈은 법학과에 가는 거였다. 시험을 잘 본 편이 아니어서 의과대에 겨우 들어갔다고 말하면서 적성에 맞지 않는 백신 연구와 실험을 주로 하는 학과가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중국에서 지냈다면 적성에 맞지 않았어도 안정된 직장이 보장되었고, 임금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역시나 한국에 오기로 결심했을 때, 주변에서는 모두 다 반대했다.
알파걸 그녀의 친정 엄마, 아빠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민박과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한국손님을 많이 접하면서 한국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한국에 오고 싶은 마음도 부모의 영향으로 갖게 되었다. 지인의 아들(현재의 남편)이 중국에 여행왔고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의 삶을 살고 있다. 남편의 첫 인상은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미 씨를 무척 챙겨주고 이끌어주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자상함에 빠진 것 같아요.”
처음 한국으로 이주해 왔을 때, 신랑이 일을 하러 가면 혼자 집에서 우두커니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퇴근 후에 나란히 손 마주잡고 단지나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버스 타는 법이나 카드를 사용하는 방법 등 익숙치 않은 문명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2개월 만에 ‘장미’씨 지원을 나선 것은 중국에서 온 어머니였다. 선경험이 풍부하고 한국의 지리나 관습을 잘 알고 있던 어머니는 장미 씨의 코치를 자청하고 나서서 현재 아들 ‘현재’를 키우며 쭉 함께하고 있다. 많은 지원과 지지를 보내준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처음 마산에 와서 경상도 말이 잘 안 들리는 거예요. 적응하는데 고생하고, 버스 놓치기 일쑤고 갈아 타는 것도 모르겠고. 엄마가 오셔서 알려주시고 신랑이랑 자주 통화하면서 초기 적응을 했어요. 사실 중국에서 있을 때 한국에 대한 정보는 드라마가 유일했는데, 드라마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와서 깨달았어요. 두 나라가 많이 닮은 듯 해도 한국의 문화는 많이 달라서 공부를 해야 하고, 초기 정착에는 한국어를 꼭 알고 오는 것도 무척 중요해요.”
중국 예법이 많이 비슷할 것도 같은데 그래도 차이가 있는지 물으니 시집에서 남녀가 상을 따로 받는다든지, 제사에서 여자는 절을 하지 않는다든지하는 것들을 꼽았다. 혹시나 시집살이를 하는지 물었는데 오히려 ‘시엄마빠’에 가까웠다.
“전 정말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시집은 경북 의성인데 가부장적인 것은 있지만 두 분이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들이어서 시집살이나 고부간갈등이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때때로 음식 보내주시고 챙겨주시고, 현재(아들) 키워주시고 싶어하셔서 그게 친정엄마와의 갈등이라면 갈등이에요.”(웃음)
중국에서 무남독녀로 애지중지 키운 장미 씨를 한국에 보내고 한동안 친정엄마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한다. 아들 현재는 시집에서도 귀한 손. 보기 드물게 서로 아이를 맡아 키우고 싶어하셔서 그 속에서 장미 씨는 자신의 일과 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장미 씨는 원어민양성과정을 이수하고 어린이집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유아교육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한다. 눈물을 흘리기도 여러 번인데, 이제는 어린이집 교사로 활동하는 것이 적성에 딱 맞다고 이야기하며 연신 신나서 교안 이야기를 한다.
시간을 쪼개어 어린이집 교사 활동 외에도 한달에 한 번 경남 다문화방송에서 중국어 뉴스 앵커를 맡아 진행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쉬는 날에는 인타클럽(International NanTA CLUB)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 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의 핑크리본 캠페인에서 다문화멘토도 맡아서 월별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처음 경남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가게 된 것은 우편물 때문이었어요. 집에서 무료하게 보내고 있던 정착 초기에 한국어교육 안내문이 왔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문밖에 나가지 않았을 때에는 제도나 적응에 대한 우려가 많았는데…진작 나왔어야 했어요.”(웃음)
센터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고 5~6개월은 인턴으로도 활동했다. 언어에 대한 자신감과 커뮤니티를 만나게 되면서 장미 씨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한국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인타클럽은 특히 다른 교육이랑은 다른 게 우리들 스스로 모임을 가진다는 거예요. 출신 국적은 서로 다르지만
한국생활과 관련한 소식도 공유하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무척 좋고. 무엇보다 무대 위에서의 쾌감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예요. 하지만 한국어가 되면 모두 다 일을 시작하다보니, 이런 취미활동을 선택하지 않아요. 그래서 회원 모집이 어려운 게 있어요.”
장미 씨는 다문화 이주여성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시시콜콜한 사생활에 대해 묻는 것이 관계에 개선이 된다기 보다는 자극이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인사성 밝은 신랑의 주특기로 동네에서 이쁨 받는 커플이 되어 아기 책이나 옷을 받았던 것은 감사했다고.
이야기 중간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도 수줍어 하며 통화를 하는 장미 씨를 보니, ‘아 사랑이구나’ 싶다.
“전 지금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워요. 사랑에는 이상이나 취미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남편과는 그게 가능해요. 앞으로의 희망이 있다면 셋이서 행복하게 나이들어서 여행도 다니고 끝까지 사랑하며 사는 거예요.”
끝으로 가족이 장미 씨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친정, 시댁, 남편, 현재… 다 너무 소중하고 든든한 존재예요. 처음 강의 나갔을 때 무척 떨고 긴장했는데, 내 편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신랑이 메시지로 “파이팅” “할 수 있어”라는 문자를 보내줬는데 눈물이 났어요.”
덧붙여 어른들의 현명함과 조언, 지지로 삶의 지혜를 얻어간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결혼이민자로 사는 것, 알고 나면 만족스럽다고.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았을 거예요. 저에게는 한국이 기회가 되었고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촉매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