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스토리] 공간의 힘과 가능성_부천여성노동자회/전북여성단체연합
- 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 공간문화개선사업
- 여성임파워먼트
“안녕하세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한켠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급히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으려 돌아서는 뒷모습이 어쩐지 안쓰럽고, 듬직하기도 했다. 오늘 방문은 미리 약속된 만남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야만 하는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리는 곳이기에 기다리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괜찮았다. 그렇게 몇 통의 전화통화를 끝내고서야 겨우 마주 앉은 얼굴, 부천여성노동자회 김정연 대표다.
“공간개선 과정에서 저 때문에 마음고생 하신 분들이 계실 거예요.”
김정연 대표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들어보니 여성재단은 물론 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 사업 담당자와 직접 통화를 불사하며 따져 물을 건 묻고 요구할 건 요구하고 했단다. 지원받는 단체라고 해서 주눅 들어 있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는 그의 당당함이 멋져보였다. 단체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만든 극성(?)이었기에 이해도 됐다. 부천여성노동자회는 30년 전 부천지역 여성운동의 시작을 알린 단체이자 성평등 노동이 현실화 되는 “내일”을 위해 늘 “오늘”을 꽉 채워 사는 곳이었다. 낮에는 노동 상담이 쉴 새 없이 이루어지고 야간엔 노동을 끝낸 여성들이 모여 교육, 회의 등의 모임이 항상 가득 차 있다.
부천여성노동자회가 지금의 자리로 이사 온 건 2002년,
냉난방 설계가 안 된 건물에 입주한 터라 겨울엔 석유난로를 끌어 썼고, 10년 넘은 에어컨 하나로 삼복더위를 버텼다. 그러면서 십여 년간 터져 나온 임금, 채용의 성차별 문제와 직장 내 성폭력 문제 해결에 앞장서느라 낡고 삭아가는 공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대부분의 회원이 비정규직 여성들이다 보니 후원금으로 시설을 보수, 개선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공간보다 사람이, 사무실보다 노동현장의 문제가 더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2018년 공간문화개선사업에 선정되어 교육공간을 개선했다.
“저희가 있는 곳에 지하철역이 가까이 있어 접근성은 정말 좋은데, 공간이 따라주지 않아 실제 활용을 효과적으로 하진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 사업에 선정되면서 편안하고 안정적인 공간이용이 가능해졌고 오시는 분들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어요.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에 신선한 활력도 생기고요.” (부천여성노동자회 김정연 대표)
그리고 여기, 전북 전주에 터를 잡고 지속가능한 성 평등 사회를 위해 현장 안팎을 부단히 뛰어다니는 단체가 있다. 전북지역을 기반으로 둔 9개의 여성단체가 함께 모인 전북여성단체연합(이하 전북여연)이 그 주인공. 2018년에 30돌을 맞이할 정도로 역사 깊은 곳이다. 부천여성노동자회와 마찬가지로 2018년 공간문화개선사업 단체로 선정 돼 교육공간을 개선했다.
“우리 소식지에 보라색을 입혀 준 분이세요.”
전북여연에 들어서자 김형선 사무국장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누군갈 소개했다. 전북여연의 30년 된 후원 회원이자 날이 날인만큼 30주년을 알리는 소식지를 컬러로 (원래는 소식지를 흑백으로 제작해왔다), 그것도 당신이 직접 제안하여 바꾸는 데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소개 받은 회원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이 공간이 얼마만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공간인지 새삼 실감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래서 모이고, 그렇게 모인 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데 헌신하는 일엔 늘 앞장선 전북여연이지만 쓰고 있는 공간의 열악함은 의욕과 열정만으로 바꾸는 데 한계가 있었다.
“오래된 한옥주택을 사무실로 쓰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출근 할 때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창이 없고 천장이 낮아 어두웠고, 사무실과 교육공간이 분리가 안 되다 보니 조용히 인터뷰하거나 얘기할 공간도 없었고요.” (김형선 전북여연 조직국장)
애초에 사무공간으로 설계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공간구획이 효과적으로 나눠지지 않았고, 수납공간도 턱없이 부족해 공간 자체가 산만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거기에 어둡기까지 했다니 그런 공간에서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활동가들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없던 환함과 거기서 나오는 활기가 넘쳐난다.
“공간문화개선사업은 나를 아주 잘 알고 친밀한 친구에게 받은 선물과 같아요. 대충 고른 선물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딱 맞는 것을 골라주는 사이가 그렇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공간이 무엇인지 함께 의논하고, 고민하고, 설계하고, 같이 세팅을 해 준다는 데서 의미가 커요. 소중한 친구에게 귀중한 선물을 받은 것 처럼요. 이번엔 저희가 선정됐지만 다른 여성단체들에게도 골고루 지원이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전북여연 김형선 국장)
“좋은 환경을 갖출 여력이 없는 단체에게 이런 지원이 있다는 게 힘이 되고, 결과물을 통해 자긍심을 얻고 덕분에 좋은 에너지가 돈다는 게 정말 좋은 거죠. 공간은 그곳에 오는 사람들의 기운과도 연동되어 있어요. 이번 공간 개선을 통해 좋은 기운과 힘을 얻은 거죠. 이 사업이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사업으로 남아 저희와 같은 다른 비영리 여성단체에게 보다 많은 지원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부천여성노동자회 김정연 대표)
전북여연의 김형선 국장과 부천여성노동자회의 김정연 대표 두 사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사업의 지속성에 대한 바람을 밝혔다. 그만큼 이 사업이 특별한 것일 테다. 공간의 힘과 가능성을 일찍이 알아본 사업이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단체들의 온도 변화도 크다. 깨끗하고 밝게 바뀐 공간을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지만, 그 공간을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진심을 들을 때 정말 마음이 따듯해진다. 더욱 중요한 건, 취재 차 들렀음에도 나 역시 뭐라도 하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여 진다는 사실이다. 두 단체를 만나고 돌아오며 문득, 이 사업의 진짜 힘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주저앉지 않게 하는 힘, 마음에 온기를 불어 넣는 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