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방처럼 따뜻한 울산여성의전화 노인상담소

  • 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 공간문화개선사업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가을비가 선선히 내리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비 때문일까? 울산 시내 한복판, 활기찼던 문화의 거리도 오가는 사람 없이 을씨년스러웠다. 어깨를 움츠리며 들어선 곳은 울산여성의전화, 2015년 공간문화개선사업에 선정돼 교육장과 면접, 전화 상담실이 새로 생겼다.

바깥 공기와는 사뭇 다른 훈훈함이 훅 끼쳐왔다. 화사한 공간과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여성의전화 식구들의 분주한 움직임. 우중충한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는 소란스러움이 만들어 낸 온기에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륵 풀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교육장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벗어 놓은 신발 때문이었다.

울산여성의전화 교육장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좌식 교육장이다. 입식보다는 관리하기도, 실무자들이 움직이기에도 불편한 구석이 있었지만 꼭 필요했다. 이 공간의 주이용자들의 특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상담과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서는 이용자들에게 최대한 편안하고 안정감을 주는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뜨끈뜨끈한 방구들이 있는 교육장이었다.

교육장에선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내담자들이 모여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끝나면 생각 나누기를 한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추억, 6.25 전쟁경험, 시집살이 등등. 살아오면서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마음속에만 묻어뒀던 오래된 이야기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꺼내놓는 자리를 갖는다고 한다.


의자보다는 온돌방이 더 편한 사람들, 억눌리고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 눌려 목소리를 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 여성노인들이 이 공간의 주이용자다. 교육장 앞 옹기종기 놓여있던 신발은 비 오는 이른 아침부터 여성의전화를 찾아온 노인들의 발길이었던 것이다.

전부터 여성의전화는 가정폭력, 성폭력, 아동청소년문제 등을 주로 상담해왔는데 지금은 여러 곳에 전문상담소가 생기고 관련 문제들을 전문적으로 케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됐어요. 그런데 노인을 대상으로 상담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은 없는 거예요. 평균수명은 점점 높아지고 노인인구는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심리지원 상담소 하나 없는 현실이었어요. 노인 우울증, 노인 갈등, 노인 자살률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전문 상담소의 역할이 시급했어요.” (박동주 사무국장)

그래서 2015년 공간개선사업을 진행할 때 교육장만큼은 여성노인들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특화시켰다. 여성의전화가 운영하고 있던 ‘노인상담소’의 기능을 강화시킬 목적이었다. 교육장 시설이 낙후되고 이렇다 할 상담실이 없을 땐 노인들이 있는 복지관, 경로당으로 직접 찾아가 상담을 진행했다. 그러나 상담내용의 비밀유지가 어렵고, 진행할 수 있는 상담프로그램도 국한되었기에 전문적인 심리지원을 하기가 버거웠다. 공간개선사업 이후 온돌 교육장이 생기고 면접 상담실이 따로 생기면서 노인들을 직접 공간으로 모셔와 면접상담은 물론 다양한 심리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모인 어르신들 중에 어렸을 때 꿈이 있었다는 분이 한 분도 안계셨어요. 친정어머니, 아버지 임종을 지켰다는 분도 없고요.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 스스로의 존재는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노인여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스스로 꺼내놓고 풀어놓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요. 영화, 미술, 사진, 역할극이 당신들의 묵혀둔 마음의 소리를 꺼내게 하는 열쇠가 되는 거죠.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어르신들이 억압된 감정들을 해소하고 위로도 받고, 울고 웃다가 후련한 기분으로 돌아가시곤 해요. (김은수 상임이사)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나’에 대해, 내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용기 낸 발걸음, 오랜 세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첫걸음을 위해 준비한 온돌방. 어르신들의 벗어 놓은 신발이 더없이 따뜻하고 애틋했다.

2011년부터 준비해 온 울산여성의전화 노인상담소는 2017 공간활용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전문적이고 역량 있는 노인전문상담시설로 거듭나고 있다. 공간 여력이 없어 할 수 없었던 상담, 교육, 심리지원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8개 집단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편, 노인상담사과정을 개설해 노인상담활동가를 양성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국가서비스로 진행되고 있는 1388 청소년상담전화, 여성쉼터, 다문화가정지원 등 모두 여성의전화에서 처음 시작된 사업이다. 언제나 여성인권의 최전선에서 일을 만들었던 큰언니가 여성의전화였던 셈이다. 큰언니답게, 울산여성의전화도 노인상담소 개설에 제일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없던 길을 만들어 내고 있다. 비어 있는 인권의 자리를 알아보고 채워나가는 길, 때론 외롭고 괴로울 그 길에 온돌방의 온기처럼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글ㅣ 이소망 작가

<저작권자© 한국여성재단> 2017/10/12 16:42